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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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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로마곤도라 작성일 17-03-06 12:35 조회 352 댓글 0
 

로마곤도라 / 여행정보

역사

고대의 로마

로마 지역에는 일찍이 청동기시대(BC 1500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나, 본격적인 거주가 이루어진 것은 BC 1000년경부터이다.

그러다가 BC 8세기에 철기를 사용하는 다양한 인도유럽어족이 처음에는 팔라티노 구릉과 아벤티노 구릉에, 그 이후에는 에스퀼리노 구릉과 퀴리날레 구릉에 외떨어진 마을들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들 마을에서 발견된 유물과 장례 관습으로 미루어보아 처음부터 다양한 문화집단(라틴족과 사비니족)이 장래의 로마 시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BC 6세기초에는 북쪽에 위치한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의 영향력 아래 정치적으로 통일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왕정시대는 에트루리아 왕조의 쇠퇴와 함께 BC 509년 또는 BC 470년경에 무너지고 공화정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BC 390년 갈리아족의 포위공격으로 카피톨리노 구릉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즉각 도시 재건에 착수한 로마인들은 도시 외곽에 빙 돌아가며 거대한 응회암 덩어리로 성벽을 쌓았다. 이 당시의 성급한 도시 재건이 이후 로마를 무계획적인 외형의 도시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리비우스 같은 이는 로마가 계획대로 건설된 도시라기보다는 마치 무허가 주택들이 들어선 도시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쨌든 성벽 건설 이후 8세기 동안 어떤 이민족도 그 성벽을 넘어 로마를 침범하지 못했다.

로마는 BC 375~275년 괄목할 만한 영토 확장을 이룩했고, 이는 오랜 세월 로마에 경제적인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BC 250년경 로마 시의 인구는 거의 10만에 육박해 있었으며 정복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전리품은 신전·도로 건설과 수로개량 등 각종 공공사업에 필요한 재원 마련에 큰 도움이 되었다.

로마인들은 BC 3세기초에 이미 2개의 수로를 통해 깨끗한 물을 시내로 끌어 쓰고 있었다. BC 2세기에는 도시 인구가 급속도로 팽창하고 시민의 수가 늘어나면서 도시 투표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로마 제국의 주요 정책수립기관이 된 원로원은 제국이 직면한 잡다한 문제들에 집착, 로마 시의 문제들을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별도의 시 행정기관도 없었기 때문에 각종 공공사업이나 식량관리 및 식수조달은 비전문적인 관리나 일개 개인들의 업무가 되었다. 그러나 도시발전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몇몇 주요거리가 포장되고 하수도 복개공사가 이루어졌으며, 포룸에는 몇 개의 커다란 바실리카와 새로운 상가가 들어섰다. BC 142년 테베레 강에 최초의 석조 다리가 놓였으며 BC 144년에는 수도교(水道橋)가 최초로 건설되어 로마 시 동쪽 산기슭 고지대에도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BC 1세기 전반부는 시민 투쟁으로 점철된 시기로서 이 시기에 인구 및 도시 문제가 크게 증가했다. 로마의 상류층은 점점 더 사치스런 생활에 탐닉해 들어갔는데, 술라와 폼페이우스가 해놓은 건설사업에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각지에서 들어온 공물과 전리품을 재원으로 해서 건설된 공공건물과 극장들은 로마를 보다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었지만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게다가 로마로 몰려드는 수많은 이주민, 특히 동쪽 그리스로부터 몰려온 이주민들로 인해 심각한 인구문제가 더 한층 악화되었다.

로마가 안고 있는 도시문제들을 체계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인물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그러나 그는 테베레 강의 운하 공사와 캄푸스 마르티우스 건설 등이 포함된 자신의 도시계획을 실현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양자이자 후계자였던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를 새로운 제국의 수도에 걸맞는 도시로 탈바꿈시키고자 노력했다. 벽돌로 되어 있던 도시를 대리석 도시로 바꾸어놓았다는 그의 말은 과장된 것이지만, 어쨌든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로마 시에 여러 아름다운 공공건물·목욕탕·극장·신전·창고들을 남겨놓았다. 이 건설사업은 오래된 건축물들의 개축사업과 동시에 진행되어 도시민들의 고용증대 효과를 낳았으나 전반적인 도시계획의 미흡으로, 로마인들은 좁고 구불구불한 고(古) 로마의 거리와 골목에 흩어져 있는 불안정하고 비위생적인 주택에서 살아야 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이자 지지자였던 아그리파는 막대한 사재를 털어 도시 미관을 향상시키고 식수공급을 개선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도시 행정체계를 재정비하고 여러 공공기관을 설립함으로써 이전의 공화정 시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BC 7년에 그는 로마를 14개의 레기오네[區]로 구분하고 그것을 다시 여러 비키[地區]로 나누어 담당 관리들로 하여금 구역행정 및 종교업무를 관장케 했다.

그가 BC 26년경에 부활시킨 도시 장관직은 오래가지 않아 없어졌으나 제국 말기에는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황제들은 거의 대부분 그의 행정정책과 건설계획을 계승해나갔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업적과 비교하면 겉치레에다 독창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클라우디우스는 오스티아 부근의 테베레 강 하구에 커다란 항구를 건설하여 로마까지의 곡물 직송을 꾀했다.

교역은 대부분 개인들에 의해 행해졌으며, 관리들은 안정된 물자보급과 투기근절에 주력했다. 네로 황제는 가장 현대적인 도시계획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지불한 대가는 엄청난 것이어서 AD 64년의 대화재는 로마 시를 상당 부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는 폐허가 된 로마에 거리와 열주(列柱), 그리고 자신의 화려한 황금집을 새로 건설했으며 시민들로 하여금 공중 식수공급이 용이한 보다 넓고 내화성이 강한 주택 및 공동주택을 지을 것을 장려했다.

네로는 로마를 보다 살기 쾌적한 도시로 만들었으나, 그의 조치들로도 191년의 대화재를 예방하지는 못했다. 191년의 대화재 때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복구사업을 했다. 1세기말부터 2세기초반까지의 다른 로마 황제들은 웅대한 황실, 대광장, 신전, 아치, 목욕탕, 경기장 등을 건설해 로마 황실의 위엄을 살리고 로마 생활에 즐거움을 더했다.

그당시 로마는 웅대함과 인구 규모에 있어 절정기였는데, 이때 인구가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그 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는 각 속주에서 끊임없이 몰려오는 노예와 자유민들로 늘 북적댔지만 평균 예상수명은 제국의 그 어느 지역보다 낮았다. 또 포장도로, 식수공급 시설, 하수처리 시설이 유명한 것에 비해 네로의 개혁 이후에도 수많은 로마 거주민들은 여전히 온방·상수도·주방 시설도 안 되어 있으면서 값만 비싸고 인구 과밀의 빈민가에 살아야 했다.

로마의 인구는 2세기말부터 줄어들기 시작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아누스 재위 기간중 발생한 전염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하루에 2,000여 명씩 목숨을 잃었다.

로마는 3세기에 경제적·정치적으로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270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된 성벽은 옛 영광의 재현보다는 당시 이민족으로부터의 위협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상징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행정을 개혁하고 거대한 목욕탕들을 건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이제 더 이상 제국의 행정중심지가 아니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이 건설되면서 정치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의 건축물과 기념물들을 재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규모가 작은 로마의 그리스도교 지역공동체를 후원하여 중세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초석을 쌓았다.

410년 로마를 포위 공격했던 알라리크의 서고트족 군대는 3일 동안 약탈을 해서 많은 전리품을 가져갔다. 그러나 당시 로마의 기념물들은 큰 손상을 입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교회는 대부분 피해를 면했다. 455년에도 14일 간에 걸친 반달족의 약탈이 있었지만 그 피해는 로마인들 스스로가 입힌 것보다는 덜했다.

4세기와 5세기에 로마 황제들은 건축물이나 기념물 등에서 대리석 등의 건축자재를 빼내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법을 몇 차례나 만들어야 했다. 5세기 중엽 로마 인구는 25만 명 이하로 떨어졌다.

교황들의 도시

테오도리쿠스 황제의 사망(526) 이후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벌인 이탈리아 재정복 사업은 이탈리아와 로마에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로마는 3차례에 걸쳐 포위공격을 받았으며, 그 와중에 수로가 끊기고 로마인들이 로마를 포기하고 피난가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8세기 중엽에 들어 더이상 동로마 제국의 군사원조를 받을 수 없게 된 로마 교황은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774년에 롬바르디아 왕국을 정복한 샤를마뉴가 800년에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황제 자리에 올랐고, 로마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8세기말에서 9세기초 사이에는 많은 교회들의 신축과 복원이 이루어졌다(카롤링거 왕조). 9세기말부터 11세기 중엽까지 로마와 교황들은 여러 지주귀족 가문의 지배를 받았으며, 독일계 황제들의 지배를 잠깐씩 받기도 했다. 귀족들과 교황들 간의 수십 년에 걸친 패권다툼 끝에 교황들은 11세기말에 이르자 불안하나마 가까스로 로마의 평화를 지킬 수가 있었다.

1084년에는 노르만족의 침략이 있었고, 이후 대대적인 로마 시 복구사업이 있었다. 교황 레오 9세(1049~54 재위)는 로마의 새로운 명문가인 프란지파네 가문과 피에를레오네 가문 등의 재정지원을 받아 개혁을 단행했다.

1143년 성립된 콤무네(commune)는 당시 북이탈리아에서 진행중이던 다른 콤무네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주교(로마의 경우에는 교황)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려는 것이었다.

로마 원로원과 기타 옛 제도들이 부활된 것은 브레시아 출신인 아르날도의 설교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신부이자 수사였던 그는 세속사에 대한 교회의 관여와 교회 재산에 대해 강도 높은 비난을 퍼부었다. 로마의 새로운 공화정 체제는 교황과 황제의 반대에도 계속 유지되어 1188년이 되자 교황 클레멘스 3세는 마침내 콤무네 정부를 승인했다.

13세기 후반에 들어서 교황들은 로마에 거의 거주할 수 없었다.

1280년대와 1290년대에 로마는 콜론나·오르시니·안니발디 가문들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패권다툼으로 사분오열되었으며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가 이들 가문간의 불화를 더욱 부채질했다. 1309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겨갔고, 로마는 명문가들의 분파싸움 속에서 경제적으로 빈곤한 도시로 전락해갔다. 또한 수많은 사망자를 낸 흑사병으로 인구는 2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1377년 교황이 아비뇽으로부터 로마로 돌아왔으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1400년경 로마는 오두막·도둑·해충으로 가득찬 도시였으며, 밤에는 성베드로 대성당 부근에 늑대가 출몰했다(아비뇽 교황청).

1420년 마르티누스 5세가 교황이 되면서 로마는 르네상스 도시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이후 교황의 절대 권력은 1870년까지 계속되었다.

마르티누스 5세는 건축가도 예술옹호가도 아니었으나 로마를 르네상스 국가의 수도로 만들어준 행정조직의 초석을 쌓았다. 로마 교황들은 이탈리아 전역으로부터 학자와 예술가를 끌어들였고, 15세기말에 이르러 로마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레오 10세(1513~21 재위)는 산피에트로 대성당의 보수작업 등을 계획하고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등의 예술가들을 후원하여 문화가 절정기에 달하게 했다.

로마는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의 통치 아래 경제적인 번영을 이루었다.

현대 도시의 발전

1527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가 이끄는 군대가 로마를 침략하면서, 르네상스 중심지로서의 명성은 끝이 났다.

8일 동안 수많은 교회·궁전·가옥 등이 약탈·파괴되었으나 반(反)종교개혁을 부르짖는 교황청의 억압적인 통치 아래 로마는 다시 소생했다. 새로운 건설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교황 식스투스 5세(1585~90 재위)와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한 방대한 도시계획 사업으로 정점을 이루었다.

1600년에 이르러 로마는 다시 번창한 대도시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황청 업무와 기타 관련 서비스업에 종사할 기회를 찾아 몰려들면서 인구는 10만 명을 넘어섰다.

17, 18세기에 들어 로마의 명문가들은 화려한 대저택을 짓고 예술을 후원하는 한편 고위 성직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애썼다. 최고의 성직자인 교황을 배출한 가문은 부와 명예를 한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부정과 뇌물수수가 공공연히 이루어지면서 유럽과 교황령에서조차 교황과 로마의 권위는 그 영향력을 잃어갔다.

1798년 나폴레옹 군대가 처음으로 로마를 점령하고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로마와 교황령은 1809년 프랑스 제국에 합병되었다. 1814년에는 교황이 로마에 복귀했고, 이후 오랫동안 억압과 반동의 시대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레오 12세와 그레고리우스 16세는 교육제도를 개선하고 새로운 공중목욕탕과 건물들을 세웠다. 재임 초기에 개방된 자세를 보였던 교황 피우스 9세(1846~78 재위)는 1848년 입헌제를 허용했으나, 1848~49년에 있었던 혁명 이후에 강경 보수주의자로 돌변해 프랑스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교황의 세속권력을 지키고 로마의 현대화를 막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교황령의 대부분은 1861년 성립된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었으나 로마만 제외되었다.

가리발디 장군이 1862년과 1867년에 시도했던 로마 점령은 실패로 끝났고, 이탈리아군은 피우스 교황을 지원하던 프랑스 수비대가 철수해버린 뒤 1870년 9월 20일 로마에 입성했다. 그해 10월의 국민투표에 의해 로마는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교황은 정부의 화해 제의를 거절한 채 스스로를 바티칸에 갇힌 죄수라고 칭하면서 버텼다. 이러한 상황은 오랫동안 지속되다가 1929년 피우스 11세와 무솔리니 사이에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되어 바티칸 시에 대한 교황의 주권이 인정되면서 해결되었다.

로마의 인구는 1870년 이후 급증해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50만 명을 넘었고, 1930년에는 100만 명이 넘었다. 거주지역은 사상 처음으로 옛 성벽에 둘러싸인 고대 로마 시 너머까지 확대되었다. 1920, 1930년대에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하에서 넓은 새 도로와 웅대한 건물들이 들어선 현대적인 수도로 탈바꿈했다.

무솔리니는 고고학적 발굴을 장려해 수많은 옛 로마의 유적들을 발견·보존하는 데 기여했다. 20세기를 통하여 로마는 거대한 행정·관광 중심지가 되었으나 다른 대도시들과 비교해볼 때 여전히 산업과 상업이 미약한 편이다.



[Daum백과] 로마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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